행복한 고슴도치 도리


우리 엄마는 천하무적이에요. 구불구불 길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뱀도, 덩치가 집채만 한 멧돼지도 엄마 앞에선 꼼짝 못 하고 물러간답니다. 혹시 호랑이냐고요? 아니요, 실은 조그만 고슴도치예요. 작은 고추가 맵다고, 엄마가 몸에 달린 가시를 바짝 세우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몰라요. 음… 그러고 보면 호랑이 엄마가 맞기는 하네요. 저한테 하시는 걸 보면요.

어젯밤엔 엄마랑 먹을거리를 구하러 갔어요. 고슴도치들은 깜깜한 밤에 일어나 움직이거든요. 그렇지만 저는 어두운 숲에 들어가면 심장이 콩콩 뛰어요. 어디서 어떤 동물이 튀어나올지 모르잖아요? 어제도 엄마 뒤를 살금살금 따라가다 어디선가 “쿵!” 소리가 나서 소스라치게 놀랐죠. 저도 모르게 몸이 동그랗게 움츠러들지 뭐예요. 알고 보니 까치가 아껴놓은 감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소리였어요.

“아니, 돌이 날아온 것도 아니고 감 떨어지는 소리에 가시를 세우면 어떡하니!”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호통이 떨어졌어요.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니 엄마가 무서운 표정을 짓고 계셨어요.

“자, 이제 네가 앞서 가렴. 언제까지 엄마 뒤에 숨을 수는 없잖아?”

하는 수 없이 입을 삐죽이며 엄마를 앞질러 걸었어요. 으, 밤바람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어찌나 으스스하던지, 지금 생각해도 무릎이 덜덜 떨려요. 이후로도 집에 돌아올 때까지 몇 번이나 꾸중을 들었는지 몰라요. 다 잡은 지렁이를 놓쳤을 때는 동작이 굼뜨다고 혼나고, 찾아온 버섯이 하필 독버섯이라 또 혼나고…. 정말이지 울고만 싶은 하루였어요.

집에 와서 내일은 나나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나는 농장 연못에 사는 오리예요. 저하고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짝이랍니다. 나나를 만나서 하소연을 실컷 해야 마음이 좀 풀릴 것 같아요.



오랜만에 해지기 전 밖으로 나왔어요. 푸른 하늘과 초록빛 나무들이 무척 아름다워요. 에구, 경치 구경을 하다 엉뚱한 길로 왔나 봐요. 여기가 어디죠? 다행히 낯익은 울타리가 보여요. 그 사이로 몸을 겨우 비집고 농장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연못이 보이지 않아요. 아무래도 평소 다니던 길과 반대쪽으로 온 것 같아요. 어? 멀리서 누가 뛰어와요. 으악, 강아지예요. 이럴 땐 재빨리 몸을 웅크려야 해요!

“킁킁, 웬 밤이지?”

강아지가 촉촉한 코를 들이밀더니 이리저리 굴려요. 어지러워서 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아이 참! 너 고슴도치 처음 보니?”
“깜짝이야! 밤송이가 말을 하네. 뭐, 뭐라고? 고….”
“고, 슴, 도, 치!”

강아지는 아직도 제가 ‘말하는 밤송이’로 보이나 봐요.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모르네요. 복스러운 금빛 털, 웃고 있는 듯 순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귀여워요.

“난 도리라고 해. 여기 연못에 사는 오리, 나나를 만나러 왔어.”
“그렇구나. 나는 골든리트리버 마루야. 우리 엄마가 이 농장에서 양떼 지키는 일을 하셔.”

마루는 혼자 산책하느라 심심했다며 길동무하자고 했어요. 뭐, 나쁘지 않은 제안인 것 같아요. 마침 마루네 집이랑 연못이 같은 방향이래요.

마루 덕분에 몰랐던 농장 동물들을 많이 만났어요. 암탉의 날개 아래서 열심히 모이를 쪼는 샛노란 병아리들, 보송보송한 털을 맞대고 잠을 청하는 아기 양들, 엄마 젖을 힘차게 빨고 있는 송아지…. 아기 동물들이 하나같이 엄마 품에서 행복해보여요.

마침내 마루네 집에 도착했어요. 마루네 엄마와 동생들이 있네요. 마루 엄마의 푹신해 보이는 털이 시선을 사로잡았어요. 마루 동생들이 잠이 오는지 하품을 하며 엄마 품으로 파고들자, 마루 엄마는 자상하게 웃으면서 아기들을 배로 품어주었지요.

“좋겠다. 나는 한 번도 엄마한테 안겨본 적이 없는데….”
“응? 뭐라고?”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나 봐요. 마루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쳐다보네요. 얼른 말을 돌렸어요.

“아, 아니야. 나 이제 가볼게. 고마웠어!”

아까 본 동물들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요. 맨날 호통만 치고 삐죽삐죽 가시만 세우는 호랑이 엄마를 둔 제 처지가 서글플 따름이에요.

연못은 마루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어요. 그런데 웬일인지 연못가가 조용하네요. 나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숨바꼭질을 하고 있나?’

연못에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쭉 내밀었어요. 그리고 발을 옮기려는데,

“으악! 고슴도치 살려!”

발을 디딘 돌이 미끄러워서 물에 빠지고 말았어요! 짧은 다리로 열심히 허우적대지만 역부족이에요. 물은 차갑고, 힘은 빠지고….

“도리야, 미안해! 내가 도와줄게. 조금만 기다려!”

나나 목소리가 아득히 들려요. 나나는 얼른 헤엄쳐 와서 저를 붙들었어요. 곧이어 나나네 엄마가 날개로 제 배를 받치고 물에서 건져줬지요. 덕분에 겨우 뭍으로 나왔어요. 너무 추워서 몸이 오들오들 떨려요. 아주머니는 몸이 빨리 마르도록 날개로 저를 닦아주었어요. 손길이 정말 부드러워요. 만약 엄마가 이 모습을 보셨다면, 왜 조심하지 않고 물에 빠졌느냐고 또 호통하셨겠죠.

“엄마가 다른 동물로 바뀌면 좋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아주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우리 엄마는 무섭기만 해요. 매일 혼만 내시고!”
“도리가 속상한 일이 있었나 보구나. 그런데, 너희 엄마는 그런 분이 아니란다.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데.”

아주머니는 저를 위로해주고 싶은가 봐요. 하지만 그 말이 믿기지 않아요. 집에 돌아가면 엄마가 크게 꾸중할 걸요. 어휴, 벌써 눈앞이 캄캄해요.

오늘 나나와 신나게 놀려고 했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어요. 자꾸만 재채기가 나오는 통에 말 한마디 떼기도 힘들어요. 결국 다음에 다시 오겠다 하고 농장을 나왔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따라 하늘에 별이 하나도 안 보인다 싶더니 바람까지 세게 부네요. 왠지 모를 서러움에 눈물이 찔끔 났어요.

“어딜 갔다 이제 오니? 발은 흙투성이에, 몸은 흠뻑 젖고. 어떻게 된 일이야?”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엄마는 저를 보자마자 질문을 쏟아냈어요. 대답할 힘이 없어 그냥 집 안으로 들어가 누웠어요. 진짜 감기에라도 걸린 건지 머리가 지끈지끈, 온몸이 불덩이 같아요. 너무 졸려요.



도란도란 말소리에 스르르 눈을 떴어요. 따뜻한 낙엽 이불이 몸을 덮고 있어 무척 포근해요. 흙투성이가 되었던 발은 깨끗하게 닦여 있고요. 머리맡에는 조그만 물고기 몇 마리가 놓여 있어요. 그때, 오리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렸어요. 나나도 같이 있는 것 같아요. 아, 제가 걱정돼 병문안을 왔대요. 물고기는 나나가 저를 위해 잡은 거고요.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천만의 말씀을요. 그나저나, 어제 도리가 별 말 없던가요?”
“네? 무슨….”

오리 아주머니는 제가 ‘엄마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한 말을 전했어요. 저는 눈을 질끈 감았어요. 큰일이에요. 어쩌면 영원히 이렇게 잠든 척해야 할지 몰라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에요. 지금쯤 엄마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집 안이 조용해요. 심지어 흐느끼는 소리가 났어요. 무슨 일일까요? 저는 숨죽인 채 귀를 쫑긋 세웠어요.

“도리에게 상냥하게 대해야 하는데, 맨날 가시 돋친 모습만 보이고…. 씩씩하게 잘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 아직 어린 아이에게 너무 엄하게 했어요.”
“너무 염려 마세요. 도리도 머지않아 엄마 마음을 알아줄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너무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 했어요. 따뜻하고 깊은 엄마 마음을 몰라준 건 저였어요. 돌아보면 엄마는 제가 위험할 때 가시를 세우고, 꼭 바로잡아야 할 일에만 꾸지람을 했어요. 작은 일에 겁먹지 말라고 호통친 것도, 독버섯을 조심하라고 꾸중한 것도 다 저를 위해서였죠. 매번 혼날 일을 만들어 엄마를 속상하게 한 것도 모른 채 제 마음만 생각했다니…. 고개를 들 수 없어요.

오리 아주머니는 오랫동안 엄마를 다독여주었어요. 오리 아주머니와 나나가 돌아간 뒤, 저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어요. 엄마는 평소처럼 집을 청소하고 계시네요. 가만히 엄마 뒤로 다가가, 가시가 차분히 내려앉은 엄마 등에 손을 얹고 말했어요.


“엄마, 저는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영문을 모르고 돌아보는 엄마에게 생긋 웃어 보였어요. 엄마의 얼굴에도 따뜻한 미소가 번져요. 마루 엄마의 금빛 털보다 아름답고, 오리 아주머니의 깃털보다 보드라운 미소예요. 이런 엄마를 둔 저는 정말 행운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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