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체는 자기 보호 본능이 있다.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편백나무는 피톤치드라는 물질을 분비하고, 고슴도치는 가시를 세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에 놓이거나 감정적 상처를 입으면 마음의 평정심을 지키기 위해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를 발동시킨다. 삶의 만족도가 높고 위기에 잘 대처하는 사람은 성숙한 방어기제를 적절하게 사용한다. 즉, 자아가 성숙함에 따라 사용하는 방어기제도 함께 발달한다. 삶은 고통과 시련이 가득하고 시시때때로 자아의 불안을 경험하기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방어기제를 이용해 저마다의 아픔을 이겨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노력을 이해하고 서로 보듬어준다면 마음속에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빈도는 낮아지고 따뜻함이 오래도록 머물 수 있지 않을까.
편백나무는 해충과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피톤치드라는 물질을 분비하고, 메뚜기는 적으로부터 발견되지 않으려고 자기 몸을 주변의 색과 같게 변화시킨다. 고슴도치는 위협을 느끼면 몸을 웅크린 채 등에 난 가시를 세운다. 이처럼 모든 생명체는 자기 보호 본능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주먹을 휘두르면 팔로 얼굴을 감싸거나 도망하는 등 본능적으로 몸을 보호한다.
사람의 방어 본능은 신체만 아니라 자아에도 존재한다. 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에 놓이거나 감정적 상처를 입으면 마음의 평정심을 지키기 위해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를 발동시킨다. 쉽게 말해 불안, 스트레스, 공포 등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패턴이다. 방어기제 덕분에 불편한 감정이 완화될 수 있고 공격적인 행동을 자제할 수 있다. 강하기도 하지만 한없이 약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에, 방어기제가 없다면 사람은 분노와 불안감으로 고통 속에 살아가거나 통제력을 잃어 충동적인 행동을 하고 말 것이다.
방어기제는 타고난 기질과 부모의 방어기제, 어릴 적 겪었던 일 등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는데, 주로 사용하는 방어기제는 그 사람의 성격적인 특성으로 굳어진다. 1894년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처음 제시된 후 체계적으로 이론화된 방어기제는, 유형에 따라 미성숙한 방어기제와 성숙한 방어기제로 크게 나뉜다.
미성숙한 방어기제
업무 보고를 하러 갔는데 실적이 부진해 상사로부터 쓴소리를 들은 상황에서, 부하직원의 반응은 저마다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 A라는 직원은 실적이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며 변명하고, B는 당장 사직서를 쓰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C는 상사가 자신을 싫어한다 생각하고, D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며, E는 점심시간에 은근히 상사를 따돌린다. F는 자리로 돌아와 신입 직원에게 화풀이를 한다.
부하직원들의 다양한 반응은 개개인의 방어기제를 보여준다. A의 방어기제는 ‘합리화’로, 자기의 잘못이나 능력 부족을 인정하지 않고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을 말한다. 자칫 핑계하고 변명하느라 사실까지 왜곡할 수 있으며, 습관이 되면 목표를 잃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B는 ‘행동화’이다. 즉각적인 행동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것으로, 이후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본능적 충동을 만족시키지만 결국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아이들이 흔히 사용하는 원시적인 방어기제이다.
C는 ‘투사’로서, 영사기가 스크린에 영상을 비추듯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 욕망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 문제가 그에게 있다고 믿는 것이다. 상사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여기면 자신이 상사를 싫어하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남 탓을 함으로써 책임감은 덜 수 있지만 진실을 바라보지 못한다. D는 심적 고통이 병이나 특정 증상으로 나타나는 ‘신체화’이다. 불편한 사람과 식사하면 체하거나 긴장하면 복통을 겪는 식이다.
E는 ‘수동 공격’이다. 공격적인 감정을 상대에게 직접 표출하지 않고 뒤에서 비난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소심하게 복수하는 행위가 이에 해당한다. F는 ‘전치’로서, 어떤 대상으로부터 받은 분노와 증오를 만만하다고 생각되는 대상에게 해소하는 것을 말한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이다. 이 외에 ‘회피’라는 방어기제를 써서, 업무 보고를 하는 날 아예 외근을 나가버리는 G와 같은 경우도 있다.
성숙한 방어기제
H는 상사의 말에 자신도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꾹 참는다. 누군가를 탓하거나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충동과 갈등을 조절하는 ‘억제’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한 것이다. 부정적인 정서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능력으로, 방어기제 중 유일하게 의식적으로 행해진다. 타인과의 갈등을 피할 수 있는 성숙한 방어기제에 속하지만 반복되면 ‘신체화’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I는 퇴근 후 공원에 가서 달리기를 한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신체 활동을 통해 푸는 것이다. 이는 욕구와 충동을 자기 자신에게나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형태로 대체하여 처리하는 방어기제 ‘승화’이다. 스트레스를 삶의 동력으로 삼는 건강한 방어기제로, 욕망을 예술로 표출하거나 공격성을 스포츠로 해소, 질투심을 자기 계발로 변환하는 식이다. 자신에게 맞는 승화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고민하고 찾아가는 과정은 삶을 건설적이고 의미 있게 만든다.
상사에게 쓴소리를 듣고 돌아왔을 때 옆 직원이 커피를 건네자 J는 “쓴 걸 많이 마셨더니 단 게 당기는군. 설탕을 추가해야겠어” 하며 호탕하게 웃는다. 불쾌한 감정을 웃음으로 넘기는 ‘유머’ 방어기제다. 유머의 사전적 정의는 ‘남을 웃기는 말이나 행동’인데, 심리학에서는 단순히 웃기는 행위가 아닌 고통스럽고 불안한 상황을 유쾌하게 전환하는 성숙한 방어기제로 본다. 유머를 사용하면 갈등 상황에서 분위기를 누그러뜨려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부드럽게 전할 수 있다.
K는 상사 역시 실적으로 인한 심적 부담을 느낄 거란 생각에 연민을 느낀다. 이는 방어기제 중에서도 가장 높이 평가받는 ‘이타주의’로, 타인의 욕구에 관심을 가지고 헌신함으로써 갈등과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타인을 도울 때 자기효능감을 느끼는데, 자기효능감은 타인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자아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공감 능력이 뛰어날수록 이타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방어가 과도하면 무기가 된다
방어기제가 일순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방어하는 데만 급급하면 자신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해 어려움이 왔을 때 대처하는 능력도 떨어지게 된다. 또한 과도하게 사용하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꺼낸 방어기제가 자신과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고 만다.
성숙한 자기 보호의 출발점은 자신이 어떤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자신의 행동을 알아차리면 계속 사용할지 중단할지 결정할 여지가 생기고, 부적절한 방법이라면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고쳐나갈 수 있다. 그러나 방어기제는 자신도 모르게 학습하고 습관화되었기 때문에 자각하기 쉽지 않다. 어떤 말과 상황에 부정적인 감정이 고개를 드는지, 왜 기분이 나쁜지, 무엇이 불편하게 만드는지 등에 주의를 기울이면 방어 태세가 갖춰지는 시점과 이유를 찾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과 마주했을 때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상황만 달리 보아도 공격받았다는 느낌이 사라지고 방어 태세가 해제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에 몰입하기 이전에 외부 관찰자로서 이성적으로 접근해보자. 굳이 방어할 필요가 없는데 손에서 방패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상대방이 공격할 의사를 비치지 않음에도 나는 싸울 준비를 하고 있진 않은지 스스로 돌아보자.
나의 방어기제만 아니라 상대방의 방어기제를 아는 것도 관계 유지에 도움이 된다.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없었더라도 과민한 반응을 보인다면 상대방의 취약점을 건드렸을 가능성이 크다. 그럴 땐 ‘내가 상대방의 방어기제를 발동시켰구나.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주의해야 한다.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상태에서는 서로 친밀감과 신뢰감, 사랑을 느끼기 어렵다. 방어할 필요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심리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 성숙한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과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방어기제를 작동하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삶의 만족도가 높고 위기에 잘 대처하는 사람은 성숙한 방어기제를 적절하게 사용한다. 하버드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다양한 조건의 성인 814명을 전 생애에 걸쳐 연구했다. 연구를 통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노화에 이르는 행복의 조건을 밝혀냈는데, 그중 하나가 불안과 고통에 대응하는 방어기제이다. 성숙한 방어기제를 갖추는 것이 건강과 행복에 이르는 주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아의 성숙도와도 관련 있다.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떤 태도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는 그 사람이 얼마나 성숙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아가 성숙할수록 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을 상대방과 마찰 없이, 주위에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세련되게 넘길 줄 안다. 즉, 자아가 성숙함에 따라 사용하는 방어기제도 함께 발달한다.
안전한 환경에서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를 유지할 때는 방어가 필요 없다. 그러나 삶은 고통과 시련이 가득하고 시시때때로 자아의 불안을 경험한다. 방어기제가 작동하지 않는 완벽한 삶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방어기제를 이용해 저마다의 아픔을 이겨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노력을 이해하고 서로 보듬어준다면 마음속에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빈도는 낮아지고 따뜻함이 오래도록 머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