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가정의 고부 갈등을 소재로 한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문화적 차이와 소통의 어려움으로 외국인 며느리를 답답하게 여기는 시어머니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시어머니에게 불만이 쌓인 며느리의 사연이 주로 다뤄졌다. 프로그램 제작팀은 고부 갈등을 해결하고자 두 사람에게 며느리의 친정을 방문하게 했다. 시어머니는 낯설고 물선 타국에 머물면서 그간 며느리가 겪었을 고충과 서러움을 알게 되고, 며느리는 의지할 데 없는 시어머니를 챙겨드리는 사이 닫힌 마음이 열렸다. 그렇게 고부 갈등은 허물어져 화해로 마무리되는 모습이 그려졌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상대방의 처지에 놓이고 보니 서로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고 그 감정을 느끼려면 같은 입장이 되어보아야 한다.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전부 경험하기란 불가능하다. 비록 세상 모든 일을 직접 겪어보거나 상대방과 늘 똑같은 상황이 되어볼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이를 극복할 강력한 무기가 있다.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다.
역지사지는 흔히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역지사지와 일맥상통하는 말로 ‘그 사람의 신발을 신어 보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우리는 때로 상대방의 상황과 마음을 잘 알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성급하게 판단하곤 한다. 그 사람의 신발을 신어 보는 일, 역지사지로 그러한 오류를 경계할 수 있다.
자신의 세계를 넘어서는 능력
한 사람은 곧 하나의 세계와도 같다. 속한 사회, 자란 환경, 주위 사람들, 받은 교육 등 살면서 보고 듣고 체험한 것들에 의해 한 사람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또 그 세계 안에서 삶을 영위한다. 그러나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면 어려움에 봉착한다. 나의 세계만 아니라 내가 아직 보지 못한 세계, 내가 바라보는 쪽과 다른 방향에서 보이는 세계도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공동체 생활을 원만히 할 수 있다.
역지사지는 자신만의 세계를 넘어서는 능력이다.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세계로 확장하는 일, 타인의 세계를 상상하며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추론해 보는, 매우 고차원적 행위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조망 수용 능력’이라고 한다. 자신의 관점이 타인의 관점과 다를 수 있음을 인식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조망 수용 능력이 발달하지 않은 유아기 아이들은 자신이 본 것을 남들도 똑같이 본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초콜릿 상자를 보여주며 “뭐가 들어 있을까?”라고 묻고 아이가 초콜릿이라고 대답하면 뚜껑을 열어 연필을 보여준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은 이 상자에 뭐가 들어 있다고 생각할까?”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대개 연필이라고 대답한다. 자신의 관점으로만 상황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에 자신이 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도 손쉽게 하리라 생각하고, 자신과 다른 의견은 틀렸다고 여길 때가 많다. 발달과 교육 과정을 통해 자기중심성을 어느 정도 극복한 뒤에도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역지사지하려면 자신의 관점과 상대의 관점을 분리해야 한다. 자기 생각과 판단을 억제해야 상대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능력은 다양한 의견에 대한 수용과 존중을 가져오고, 이해와 사고의 폭을 넓힌다. 의사소통의 핵심 역량인 ‘공감’도 처지를 바꿔 생각하는 역지사지가 선행되어야 비로소 실현된다.
역지사지는 갈등 해결의 실마리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갈등은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라는 생각에서 시작된다. 사실 갈등 상황은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 서로의 입장 차이에서 불거진 경우가 많다.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하고 자기주장만 관철하면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한 채 감정만 상하게 된다. 누군가와 갈등을 빚고 평행선을 달린다면 상대방에게서 ‘틀렸다’는 꼬리표를 떼고 ‘내가 너무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고 되돌아보아야 한다. 갈등 상황은 역지사지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으로, 역지사지는 갈등과 분쟁을 조정하고 해결에 이르게 하는 실마리가 된다.
내가 그렇듯 다른 사람 역시 어떤 말을 하고 행동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상대방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거나 비난하는 대신 그의 말과 행동이 어떤 마음에서 비롯되었는지 알면 납득할 수 있다. 그러려면 상대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경청은 역지사지의 첫걸음이다.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다 보면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되고, 그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때로는 상대가 억지를 쓰거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할 때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들으면 분명 얻는 것이 있다. 그런 과정에서 서로의 의견 차이를 좁히고, 갈등을 해결할 절충안을 찾게 된다.
역지사지는 갈등을 해결하는 실마리의 역할도 하지만 평시에 유념하고 실천하면 갈등을 예방하는 효과도 발휘한다. 상대방의 관점으로 생각하면 ‘그럴 수 있지’ 하고 마음이 관대해져 화가 나려다가도 누그러진다. 현재 상대방의 모습은 나의 과거 모습일 수도, 미래 모습일 수도 있다. 상대방과 같은 상황에서 나 역시 같은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음을 인지하면 화를 내기보다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할 때 우리는 “입장 바꿔 생각해 봐” 하며 상대를 책망하기도 한다. 나의 입장을 헤아려주지 않으면 답답하고 서운하겠지만, 상대에게 역지사지를 강요하는 것은 자신 역시 역지사지를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 말속에는 내 입장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내 생각을 받아들이도록 압박하는 수단으로 역지사지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 내가 먼저 역지사지하여 상대를 이해하려는 모습이 상대로부터 역지사지를 끌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역지사지의 함정
우리는 어떠한 상황을 인식할 때 내가 아는 정보를 기반으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므로, 타인의 경험은 단지 내가 가진 한정된 정보만을 이용해 추론할 뿐 상대가 처한 상황에 아무리 나를 대입해도 사실은 피상적인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유사한 경험이 없거나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면 상대의 입장을 파악하고 이해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설령 유사한 경험이 있더라도 그것을 인식하는 사고방식과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완벽한 역지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생각과 마음을 헤아려 보려는 노력은 매우 훌륭하고 가치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충분히 역지사지하고 있다고 과신하거나 자신의 마음이 곧 상대의 마음이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상황을 이해하는 주체는 타인이 아닌 결국 ‘나’이다. 내가 아무리 상대방의 입장이 되려고 해도 그 사람이 아닌 이상 전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자기과신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역지사지는 독심술이 아니기에 상대를 잘 안다고 자만하기보다 내가 아는 정보가 부족하거나 오해일 수 있음을 고려해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섣불리 “이해한다”, “공감한다” 말하기 전에 상대에 대해 내가 이해한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고,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나 같으면 안 그래”라는 말은 역지사지를 오인해 상대방의 상황을 자신에게로 가져온 데서 나오는 말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은, 내가 옳고 현명하다는 주장에 불과하다.
앞서 언급했듯 세상에 완벽한 역지사지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상대방이 나를 완전하게 이해하기를 바라거나 상대방의 이해 정도가 나의 기대에 미치지 않을 때 실망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라도 내가 그들이 되지 못하고, 그들도 내가 되지 못한다. 이 사실을 인지하면 타인이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길 일방적으로 기대하는, 또 다른 함정을 피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은 마음을 가진다면 세상에 갈등은 존재하지 않고, 아울러 역지사지라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헤아리는 따뜻한 마음을 품을 기회도 얻지 못할 것이다. ‘거울 뉴런(Mirror Neurons)’은 상대방의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자신에게 일어난 현상처럼 느끼게 하는 신경세포다. 말하자면 역지사지를 활성화시키는 자동 공감 장치가 우리 몸에 내재되어 있는 셈. 이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역지사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은 아닐까.
한 가족이라도 남편의 신발, 아내의 신발, 자녀의 신발이 다르다. 신발은 곧 그 사람의 삶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신발을 신고 인생의 무게를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의 발을 자기 신발에 맞추려는 사람은 없듯,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타인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이해하는 일이다. 상대의 신발을 신어 보는 일, 역지사지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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