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체에는 이기려는 본능이 있다. 동물에게 이기고 지는 문제는 생존과 직결된다. 살아남으려면 먹어야 하고, 먹으려면 이겨야 한다. 먹히지 않기 위해서도 이겨야 한다. 생사를 가를 정도는 아니지만 사람도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며, 경쟁에서 이겨야 원하는 것을 얻고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 타인과의 경쟁이 불가피하거나 법으로 다루는 문제, 혹은 스포츠 경기처럼 승패가 명확한 경우라면 정정당당히 싸워 이기려고 노력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승부를 가리지 않아도 되는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도 시시비비를 가리며 대결 구도를 펼친다. 마치 우화 속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두 염소처럼, ‘양보는 패배, 고집은 승리’라는 편견에 사로잡히곤 한다.
두 염소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상대방을 이기려다 종내에는 파국을 맞는다. 한쪽이라도 양보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승부 없는 갈등에서 이기려는 본능만 잘 다스려도 불필요한 다툼을 줄이고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일견 모순 같은 말이, 실상은 삶의 지혜를 담은 명언인 것이다.
대화가 논쟁으로 가는 과정
상대방과 기분 좋게 대화하다가도 어느 순간 상대의 말에 반박하고,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느라 열을 올린 경험이 있는가. 그런 상황은 주로 가치관의 차이가 있을 때 나타난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성향과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습관, 신조, 윤리 등에 관한 생각과 감정도 자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상대가 나의 상식에 벗어나는 주장을 하거나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단박에 반박해 내가 옳음을 입증하려 한다. 서로 이해하며 다른 의견에 존중하는 태도를 가질 때는 대화가 가능하지만, 상대가 틀리고 자신이 맞음을 피력하면서부터는 평화롭게 대화하기 어려워진다.
상대를 논리로 밀어붙여 자기 뜻에 동의하고 따르게 할 때, 대화는 말로 하는 전쟁 곧 ‘논쟁’이 된다. 논쟁은 싸움의 불씨다. 사람에게 이기려는 본능이 있는 만큼 논쟁이 시작되면 지지 않고 이기려는 욕구가 꿈틀거린다. 순조롭게 흘러가던 대화가 논쟁으로 바뀌면 승부 근성이 발동해 자존심 문제로 번지고, 자존심이 걸리면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더라도 의견을 굽히지 않게 된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분노를 표출하며 마음에 없는 말까지 해버리게 된다.
논쟁은 어느 한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다. 물론 한쪽이 막무가내로 우기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지만, 손뼉도 마주 치지 않으면 소리 나지 않으므로 소리가 난 이상 논쟁의 책임은 쌍방에 있다.
논쟁에서 이기면 잃는다
서로 지지 않으려고 팽팽한 접전을 펼친 끝에 남는 건 무엇일까. 상대를 말로 이겨 굴복시켰을 때 얻는 건 한순간의 우월감뿐, 상대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뉘우치고 그 생각을 일깨워 준 나에게 고마워하길 바라는 기대는 무모하다.
논쟁은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사람은 논리에 설득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자신이 틀려서가 아니라 상대가 자기 말을 잘 듣지 않아서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므로 상대가 아무리 논리적이고 옳은 말을 한다 해도 논쟁에서 지면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나쁘면 반발심이 생겨 적대적으로 대하게 된다.
미국에서 존경받는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런 말을 남겼다. “만일 당신이 논쟁, 언쟁, 반박을 하면 때로는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방의 호의를 얻을 수 없는 공허한 승리일 뿐이다.” 논쟁에서 이기면 상대의 마음을 잃는다. 사람의 마음을 잃으면 이겨도 진 것과 다름없다.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는 셈이다.
직설적으로 비판하지 않으면 상대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거나 개선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직접적인 비판은 잘못된 점을 개선하기는커녕 억울함과 반발심만 생기게 하므로 다른 방법으로 다루어야 한다. 대립각을 내리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형성하면 대화가 잘 풀리는 경우가 많다.
논쟁에서 한 보 물러나면 얻는다
어린 자녀와 팔씨름하는 아빠들은 대개 힘을 쓰는 척하다가 져주는 쪽을 택한다. 팔씨름의 목적은 이기는 게 아니라 아들과 교감을 나누는 데 있기 때문이다. 대화의 목적 역시 승패를 가리려는 것이 아니라 친밀감을 형성하여 상대의 마음을 얻는 데 있다.
“적을 만들기 원한다면 내가 그들보다 잘났다는 사실을 증명하면 된다. 그러나 친구를 얻고 싶다면 그가 나보다 뛰어나다고 느끼게 해주어라.”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의 말처럼, 마음을 얻는 대화를 하려면 “맞습니다”, “그렇군요”라며 상대의 말을 적극 인정해 주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이해받기를, 자기 말이 수용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심리를 잘 아는 대화의 고수는 상대가 이기는 기분이 들게 하면서 협상을 이끈다. 상대의 말에 오류가 있더라도 반박하거나 몰아붙이지 않고, 한 보 물러나 우선 긍정하는 것이다.
물러난다고 해서 무능한 패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 의견을 내세워 분쟁이 발생하는 편보다 상대를 인정해 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편이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하는 슬기로운 선택이다. 의견이 다르다고 적이 될 필요는 없다. 대화가 잘 풀리지 않는다면 ‘상대의 적이 되고 싶은지, 같은 편이 되고 싶은지’를 생각해 보자. 이기려 하지 않으면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는 위기를 잘 모면할 수 있다. 논리적인 말이 아닌 다정한 말이 마음을 얻는다. 내가 먼저 물러나 양보하고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당장은 손해 같고, 지는 것 같아도 결국 내게 긍정적인 결과로 돌아온다.
마음에 남지 않아야 이긴 것
사람은 누구나 공감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므로, 자기 말에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타인에게 양보하고 져준다는 게 사실 말처럼 쉽지는 않다. 져준다는 건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더라도 표출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제어한다는 뜻이다. 말로만 상대의 의견을 수긍하는 체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억지로 참으면 추후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다. 은연중에 피해의식 혹은 보상 심리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참았으니 알아주겠지’, ‘이번은 내가 져줬으니 다음에는 네가 져줘야 해’라며 상대에게 뭔가를 원하고,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상대가 해주지 않으면 분노가 폭발하는 것이다.
자신이 배려한다거나 희생한다고 의식하는 경우 이러한 심리는 더욱 강해진다. 나의 말과 행동이 상대에게 배려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에, ‘내 언행은 타인을 위한 배려’라고 단정해서는 곤란하다. 상대에게 져준다고 생각하고는 알아주지 않는다며 속상해하는 것은 결국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다.
내가 상대에게 맞춰준다, 져준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상대가 더 많이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늘 참는다는 혼자만의 생각은 나와 상대 모두를 괴롭힌다. 상대에게 져주고 난 다음에 그 일에 대해 계속 곱씹거나 감정이 쌓이면 진정 이겼다고 할 수 없다. 한 보 물러선 이후에도 상대를 그 자체로 이해하고 그 일이 마음에 남지 않을 때, 비로소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법칙이 성립된다.
당시에는 매우 중대해 보여도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많다. 한 치라도 물러서면 큰일 날 것 같았는데 훗날 돌아보면 왜 그리 기를 쓰고 이기려 했나 싶을 때도 있다. 특히 가족 관계는 경쟁 상대가 아니고, 가정은 이치를 따지는 곳이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옳고 그름을 따지며 서로 지지 않으려고 하면 남는 건 상처뿐이다. ‘어떻게 이길까’보다는 ‘무엇을 얻을까’가 더 중요하다. 갈등의 씨앗인 논쟁이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서로 져줄 때 가정에 평화가 깃든다.
이기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지만 지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아빠가 자녀에게 팔씨름을 져주는 이유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게 양보하고 사과하는 이가 있다면, 이길 힘이 없다거나 나에게 잘못해서라기보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데 가치를 두면 억지로 참지 않고도, 어떻게든 이기려는 무의미한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 있다. 이기려고 하면 모두 불행해지지만 져주면 함께 행복해진다.
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