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 아저씨의 따뜻한 전시회


작은 호수가 있는 마을. 그곳에 화가, 준 아저씨가 살고 있습니다. 준 아저씨의 꿈은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주는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런 그림들로 근사한 곳에서 전시회를 열 날을 기다리며, 아저씨는 오늘도 작업실로 향합니다.

작업실 커튼을 열어젖히자 큰 창문 밖으로 호수가 펼쳐집니다. 아저씨는 오늘처럼 비가 와서 구름이 낮게 깔린 풍경을 좋아합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저씨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음악을 즐겨 듣습니다. 가끔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듣기도 하지요.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감상에 젖은 아저씨는 커피를 마시고 스케치를 시작했습니다. 비 내리는 호숫가 풍경이 조금씩 캔버스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똑똑.”

순간 아저씨의 미간이 찌푸려졌습니다. 촉촉한 감정이 점점 고조되다 찡그린 얼굴과 함께 달아났습니다. 아저씨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저씨의 장모님이었습니다.

“텃밭에 갔더니 깻잎이 싱싱해 보여 좀 따다가 깻잎 전을 부쳤네. 간장도 가져왔으니까 싱거우면 찍어 먹고. 자네가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니 이 시간이면 배고프지 싶은데, 이거 얼른 먹고 하던 일 계속하게.”

얼마 전, 병원 신세를 진 장모님은 당분간 이곳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아내가 엄마를 모시고 싶어 했고, 딸 은효도 외할머니를 곧잘 따르거든요. 실상은 장모님을 모신다기보다 장모님이 와서 집안일을 도와주는 셈이 됐지만, 아무튼 아저씨도 흔쾌히 찬성했습니다. 때로는 세 가족이 지내기에 적적할 때도 있어서 가족이 한 사람 더 늘면 좋을 것도 같았습니다.



단조롭던 아저씨의 일상은 장모님이 오고난 후부터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아내가 일하러 가고, 은효도 학교에 가면 홀로 남아 조용히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모님이 함께 살면서 아저씨의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장모님의 관심이 부담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사위를 자식처럼 생각하는 장모님의 마음은 아저씨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어 독립심이 강한 아저씨에게 가족의 따듯한 사랑을 알게 해준 사람도 장모님이었으니까요. 장모님의 자식 사랑은 따라올 사람이 없습니다. 부지런하고 베풀기를 좋아해 누군가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 하면 어느새 뚝딱 만들어 내어오는가 하면, 바느질 솜씨도 좋아 커튼이나 옷을 단번에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장모님은 사위 일에 방해가 될까, 처음에는 작업실 근처에 발걸음도 하지 않더니 언젠가부터 과일, 쿠키 등 간식거리를 갖고 작업실을 드나들었습니다. “여기서 자네 그림 보는 게 힐링이네, 힐링” 하며 종종 작업실을 떠나지 않고 스케치나 채색하는 법을 묻기도 하고 아저씨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한번은 장모님이 커피를 얹은 쟁반을 떨어뜨려, 바닥에 세워둔 작품에 커피가 묻었습니다. 얼마 전에 그린 풍경화였습니다. 아저씨가 꽤 공을 들인 작품인데 전시회에 쓰기 어려워졌습니다. 장모님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셨지만, 그 후로 아저씨는 장모님이 작업실 문을 두드릴 때면 예민해져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준 아저씨가 전시회 일로 외출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전시회 준비가 뜻대로 되지 않아 기운이 죽 빠진 채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오는데, 담벼락 앞에 놓아둔 의자에 장모님이 앉아 있었습니다. 구부정한 모습으로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는 장모님과 담벼락에 길게 늘어진 장모님의 그림자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준 아저씨는 그간 장모님을 불편하게 여겼던 마음이 누그러
져, 슬그머니 장모님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장모님, 은효 엄마 기다리고 계세요? 안에서 기다리셔도 될 텐데요.”
“이 서방 왔는가? 은효 엄마야 벌써 들어왔지. 자네 기다리고 있었다네.”
“네? 왜 저를….”
“자네가 전시회 일로 외출했다고 해서 소식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리고 왜는, 식구 기다리는 게 뭐 대수라고.”

순간 아저씨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어릴 적, 아저씨는 아버지에게 혼나고 집을 나가 하루 종일 친구네 집에서 놀다 밤늦게 돌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대문 밖을 서성이며 자신을 기다리던 엄마가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잊고 있던 그리움이 왈카닥 차올라 목이 메었습니다.

비록 전시회 준비는 순탄하지 않지만 아저씨는 이날 장모님으로 인해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평소 같으면 의기소침해진 마음을 다잡느라 며칠간 붓도 잡지 못했을 텐데, 집 앞에 나와 자신을 기다려주는 장모님 덕에 힘이 나는 듯했습니다.

‘그래, 일이 뜻대로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해보는 거야.’


그날 받은 영감을 잃고 싶지 않았던 아저씨는, 집 앞에 앉아 지는 노을을 바라보던 장모님의 모습을 벽화에 담기로 했습니다. 아내와 은효도 반겼습니다. 그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장모님이었습니다. 아저씨가 집 담벼락에 벽화를 그릴 때면 장모님도 밖에 나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습니다.

마침내 벽화가 완성되었습니다. 벽화가 생긴 뒤로 아저씨는 외출했다 집에 들어갈 때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신을 기다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가슴이 설렜습니다. 이웃 사람들도 오며 가며 벽화를 보고 한마디씩 했습니다.

“하, 그림 한번 멋지네. 꼭 우리 어머니 살아생전 모습 같어.”
“벽화의 주인공이 은효 외할머니라면서요?”
“그렇다네요. 마을에 화가 선생님이 있으니 좋네요. 이렇게 벽화도 생기고!”
“우리 집 담벼락에도 그려달라고 해야겠네.”

마을 사람들로부터 벽화를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마다 아저씨는 짬을 내어 한 집 한 집 정성스레 벽화를 그려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작은 마을에 벽화가 점점 많아져, 벽화 없는 집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책 읽어주는 어머니, 활짝 웃는 아이들, 단풍 구경하는 노부부, 결혼식장의 신랑 신부 등 가족을 주제로 한 다양한 벽화가 탄생했고, 마을 전체에 알록달록 생기가 돌았습니다.

아저씨는 벽화를 보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자신도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그저 좋아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밝게 해주었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도 감동이었습니다. 게다가 마을이 마치 커다란 전시회장이 된 듯 자신의 그림으로 채워져 어느 화가 부럽지 않았습니다.



마을의 아름다운 벽화는 차츰 입소문을 타,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갔습니다. 호숫가를 천천히 산책하고 골목길을 따라 벽화를 둘러보는 코스가 인기를 끈 것입니다. 사람들은 벽마다 그려진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보고 따뜻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덕에 준 아저씨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벽화를 그리는 화가’로 말입니다. 개중에는 아저씨 집 우체통에 그림을 잘 보고 간다는 편지와 음료수 등을 놓고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벽화 덕분에 마을이 유명해졌다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준 아저씨는 한 미술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벽화 마을의 사연을 들었다며, 전시회 장소를 빌려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저씨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전시장은 이름 있는 화가들의 작품만 전시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저씨는 자신에게 과분한 제안이라 생각해 사양했지만 미술관 측의 설득 끝에 전시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이게 다 장모님 덕분입니다. 장모님 덕분에 벽화를 그리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이제야 자네 실력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나타난 거지, 뭘.”
“저보다 실력이 훨씬 뛰어난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요. 장모님이 제 마음에 온기를 주셨어요. 그런 따뜻한 마음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을 거예요.”
“아빠, 우는 거야?”

아저씨의 눈가가 촉촉해지자, 은효가 아빠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아니, 마음이 행복하다고 눈으로 신호를 보내는 거야.”

아저씨의 아내가 은효에게 말했습니다.

네 가족이 있는 집을 품어 안은 담벼락, 그곳에 그려진 벽화 속으로 가로등 불빛이 은은히 스며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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