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엄마 아빠랑 같이 살 거야!”
호언장담했던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부모님을 떠나 해외로 나갔다. 한국과 열두 시간의 시차가 나는 곳이었다. 부모님은 오매불망 내가 전화하기만을 기다리셨다. 전화할 때마다 엄마는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힘들지는 않은지, 생활비는 부족하지 않은지 물어보셨다.
“없어요, 없어. 다음에 또 전화할게요. 안녕.”
사실 한국과 전혀 다른 문화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빵과 면을 주식으로 먹다 보니 엄마가 해주시는 집밥이 그립기도 했다. 하지만 부모님께 잘 지내는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었다. 대화가 길어지면 나도 모르게 투정 부리게 될까 봐 일부러 전화를 빨리 끊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를 만났고, 또다시 부모님을 떠나게 되었다. 결혼식을 앞둔 어느 날, 엄마와 단둘이 안방 침대에 나란히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 결혼 안 하고 평생 엄마 아빠랑 같이 살 거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계셨다. 원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간다는 엄마의 말에 한바탕 웃었다.
엄마는 내가 해외에 있을 때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셨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궁금하다고 하셨다. 나는 차마 내색하지 못한 힘들었던 일부터 행복했던 순간까지 엄마에게 허심탄회하게 얘기했다. 엄마는 내가 코로나에 걸려 며칠 동안 아팠다는 말에 울컥하셨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생긴 에피소드에 소녀처럼 깔깔 웃으셨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인생 선배로서 조언도 해주셨다. 그렇게 내 이야기를 신나게 풀어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엄마는 내가 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어?”
엄마는 병원에 자주 다니셨다고 했다. 아빠를 따라 현장에서 일하는 엄마는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머리, 눈, 목, 가슴, 손목 등 엄마의 몸 여기저기에서 쉬어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많이 아플 때는 대형 병원까지 가셨다는데,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이제는 괜찮다고 덤덤하게 말하는 엄마를 보면서 가슴에서 죄송함과 후회가 일렁였다.
생각해 보니 나는 엄마에게 안부를 물은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지내느냐고 숱하게 물으면서도 엄마의 안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내 걱정을 하지 않게 해드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는 당연히 잘 지내실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내 생활을 하기에도 바쁘고 벅차다는 핑계로 엄마의 생활을 관심 안에 두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후회를 밑거름 삼아 새로운 다짐을 했다. 평생 엄마 아빠랑 같이 살겠다는 말을 지키지 못했으니 연락 만큼은 자주 드려야겠다고. 이후로는 틈틈이 엄마에게 안부를 묻는다. 부디 걱정 없이 건강하게, 안녕히 잘 지내시길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