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따던 날

「미안한데 고추 따러 한번 와라.」

열대야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어느 늦은 밤, 시골에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는 오빠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짧은 메시지에 오빠의 절박함이 느껴졌다. 다음 날, 첫차를 타고 시골집으로 향했다.

“엄마, 일꾼 도착했어요.”

엄마는 일손이 달리는 차에 거들 손이 왔다고 좋아하시면서도 딸이 더운 날씨에 고생할 생각에 미안해하셨다. 엄마와 함께 고추밭에 도착하니 아빠, 오빠, 새언니가 작업에 한창이었다. 고추 농사는 이번이 처음인데, 밭은 생각보다 넓었고 고추는 빨갛게 물들어 수확을 재촉하고 있었다.

엄마와 마주 서서 한 두둑을 따기 시작했다. 고랑마다 제때 뽑지 않은 풀들이 무성해 앞을 가로막았다. 평생을 농사일로 단련한 엄마의 손은 재빨랐다. 풀 때문에 고추 따는 작업이 더딘 와중에 엄마와 보조를 맞추느라 허리 한번 펼 수 없었다. 바람도 구름도 없이 태양만 이글거리는 하늘 아래 작업복과 모자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얼굴은 고추처럼 빨개졌다.

“오늘은 바람이 어제보다 낫네.”

더위에 힘들어하는 나를 의식한 듯 엄마는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마치 부는 것처럼 이야기하셨다. 무더위 속에서 날마다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빨리 해가 넘어갔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익살스러운 사연도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가 침묵을 깨고 말씀하셨다.

“아이고, 딸 힘들까 봐 앞에서 풀 다 뽑고 가네.”

그러고 보니 옆 두둑 고추를 따는 아빠가 나와 같은 고랑을 앞서가면서 풀을 헤치고 계셨다. 내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말없이 돕고 계셨던 것이다. 엄마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내 힘든 것만 알았지 아빠의 수고를 몰랐을 것이다. 여전히 덥고 몸은 무거웠지만, 불끈 힘이 솟았다. 지지 않을 것만 같던 해는 어느새 서산으로 지고, 고추 따는 일도 마무리됐다. 수확한 고추를 차에 가득 실었다. 가족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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