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을 받고 집에 오는 길이었습니다. 수면내시경 검사의 여파로 비몽사몽간 전철에서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졸다가 하마터면 내릴 역을 그냥 지나칠 뻔해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전철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데 몸이 천근만근 기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내리쬐는 햇살에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걷고 있자니, 몸은 무거워도 모처럼 평일 낮의 한가로움을 더 누리고 싶어 산책로를 따라 돌아가는 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걷던 중 문득 딸아이가 좋아하는 수박이 생각나, 수박 한 통을 사서 장바구니에 담아 어깨에 멨습니다. 수박을 작은 걸로 골랐는데도 힘이 달려서 그런지 어찌나 무겁던지요. 어깨가 빠질 것 같아 수박을 가슴에 안기도 하고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가며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걸음이 거북이같이 느리고 더뎠습니다.
겨우 아파트에 들어섰는데, 단지 내에서 화단을 소독하고 있었습니다. 아뿔싸. 저희 집 베란다 창이 활짝 열려 있더군요. 저는 무거운 수박을 안고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짐들을 내려놓기 무섭게 베란다를 향해 돌진했습니다.
꽝!
거실 창이 닫힌 줄도 모르고 달려간 저는, 그만 창에 부딪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에 얼굴이 눌려 눈과 입술이 얼얼했습니다. 아파할 겨를도 없이 급히 베란다 문을 닫고 난 뒤에야 한숨을 돌렸습니다.
거울을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부풀어 올라 욱신거리는 눈과 입술을 보고 도대체 얼마나 세게 부딪쳤는지 궁금해 홈 카메라 녹화 영상을 보았습니다. 창에 부딪치는 순간 한 1미터는 뒤로 튕겨 나가더라고요.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습니다.
영상을 가족 단체 대화방에 올리니 남편이 걱정되었는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네요. 지루하지 않게 제가 큰 웃음을 주잖아요.”
비록 얼굴은 가관이었지만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거실 창이 안 깨져서 감사하고, 생전 처음 눈에 달걀 마사지도 해보고,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일상에 이렇게 종종 웃을 일을 주셔서 제 부족함을 깨닫게 하시고 또 채워주시니까요. 내일은 또 무슨 일로 웃게 될까요?